중세 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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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성기는 중세를 3분한 시기 중 하나로, 11세기부터 13세기를 아우르며 유럽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겪었다. 이 시기에는 동서 교회의 분열, 십자군 원정, 강력한 왕권의 등장, 장원제의 동요, 상업 및 무역의 발달, 그리고 기사도의 융성과 같은 주요 사건들이 일어났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발전, 고딕 건축의 등장, 다양한 문학 및 음악 작품의 창작, 그리고 과학 기술의 혁신 등 문화와 사상,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중세 성기는 중세를 셋으로 나눈 시기 중 하나로, 다른 둘은 중세 전기와 중세 후기이다.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피렌체사》(1442년)에서 처음으로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 역사가였다.[21] 플라비오 비온도는 《로마 제국 쇠퇴사》(1439년-1453년)에서 비슷한 방식을 사용했다. 이러한 3분할은 독일 역사가 크리스토프 켈러가 《고대, 중세, 신시대로 구분된 보편사》(1683년)를 출판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2. 시대 구분
2. 1. 시기별 주요 사건
780년 이후 게르만족의 민족대이동이 잦아들면서 이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조직화를 확립했다.[30]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의 과학, 철학 부흥을 이끌었다. 볼로냐 대학교, 파리 대학교 등 중세 대학 설립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노르웨이계 기독교 왕국을 발전시켰고, 마자르족은 10세기경 헝가리 왕국을 세우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이후, 알프스산맥 북부에는 많은 부족들이 정착했다. 이들은 라인강 기슭의 숲을 개간하며 프랑크 제국으로 성장했고, 가톨릭 교회와 함께 성장했다. 엘베강까지 세력을 넓힌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다음은 중세 성기의 주요 사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연도 | 사건 |
---|---|
962년 |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 |
1003년 | 실베스테르 2세 사망 |
1018년 |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이 바실리우스 2세의 동로마 제국에 점령됨. |
1027년 | 콘라트 2세, 하인리히 2세의 후계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즉위 |
1071년 | 만지케르트 전투 |
1073년 ~ 1085년 |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재위 |
1086년 | 둠스데이 북 작성, 아즈-잘라카 전투 발발 |
1088년 | 볼로냐 대학교 설립 |
1091년 | 레부니온 전투 |
1096년 | 옥스퍼드 대학교 설립 |
1147년 | 벤드 십자군 |
1150년경 | 파리 대학교 설립 |
1155년 ~ 1190년 | 프리드리히 1세 재위 |
1159년 | 한자동맹 창설 |
1169년 | 아일랜드 노르만 침략 |
1185년 |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재건 |
1205년 |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
1209년 | 케임브리지 대학교 설립, 프란체스코 수도회 창설 |
1212년 |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
1214년 | 부빈 전투 - 중세 프랑스는 부상하는 강국이 됨 |
1216년 | 도미니크 수도회 승인 |
1215년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
1218년 | 살라망카 대학교 설립 |
1220년 ~ 1250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재위 |
1222년 | 파도바 대학교 설립 |
1223년 | 프란체스코회 인가 |
1230년 | 프로이센 십자군, 클로코트니차 전투 |
1237년 ~ 1242년 | 몽골의 유럽 침략 |
1241년 | 레그니차 전투 및 모히 전투 |
1242년 | 얼음 벌판 전투 |
1257년 | 소르본 대학교 창설 |
1261년 | 비잔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정복함. |
1274년 | 토마스 아퀴나스 사망; 신학대전 출판 |
1277년 ~ 1280년 | 이바일로의 반란 – 중세 유럽의 유일한 성공적인 농민 반란 |
1280년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사망 |
1291년 | 근동의 마지막 유럽 전초 기지인 아크레가 맘루크 왕조의 알 아슈라프 칼릴에게 함락됨. |
1299년 | 오스만 1세 오스만 제국 건국 |
1321년 | 단테 알리기에리 사망 |
윌리엄 1세 사후 4세대 뒤, 노르망디 공국의 대륙 영토는 프랑스 필리프 2세에게 빼앗겼다. 채널 제도와 같은 노르망디 일부는 아키텐 공국의 대부분과 함께 잉글랜드 영토로 남았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 시대까지 웨일스는 대부분 독립을 유지했다. 잉글랜드에서 노르만 정복이 일어나자, 노르만의 영주 중 일부는 웨일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의 대군주제를 인정했지만 상당한 지방자치를 누렸다. 수년에 걸쳐 이 "마처 영주"는 웨일스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지만, 잉글랜드 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웨일스 왕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12세기 헨리 1세 치세에 재무부가 창설되었고, 최초의 의회가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1282년 웨일스를 점령하고 1301년 장남 에드워드 2세에게 웨일스 공 작위를 수여했다. 카나번 성 등 성 건축에서 볼 수 있듯 에드워드 1세의 점령은 냉혹했지만, 브리타니아를 단일 통치하에 재통일했다는 점에서 중세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2. 1. 1. 11세기
- 1054년 동서 교회 분열이 일어났다.[1]
-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가 발발하여 노르만 왕조가 잉글랜드를 정복했다.[1]
- 107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의 굴욕을 겪었다.[1]
-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제1차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1]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귀족에게 지배받게 되었다. 노르만인은 1169년에 무력으로 아일랜드를 침공하여 남동부에 요새를 세웠지만, 곧 나라 거의 전역에 정착했다. 스코틀랜드는 후에 독립을 주장했지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도 비슷한 시기에 정복당했다.
중세 전기 초,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 침공을 시작하여 1066년 9월 28일에 서식스에 상륙했다. 헤이스팅스 전투 (1066년 10월 14일)에서 잉글랜드군은 패배했고, 윌리엄은 정복자가 되었다. 윌리엄은 이 시기에 다른 적이 거의 없어 잉글랜드 나머지를 정복할 수 있었다. 노르망디 공국에 잉글랜드 왕국을 흡수 합병할 계획은 없었지만, 단지 대공으로서 필리프 1세에게 충성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독립한 잉글랜드 왕국에서 간섭 없이 지배할 수 있었고, 1066년 12월 25일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은 1204년까지 동군 연합 하에 있었다.
2. 1. 2. 12세기
2. 1. 3. 13세기
- 1200–1204년 – 제4차 십자군 전쟁[1]
- 1209–1229년 – 알비 십자군[1]
- 1215년 – 마그나 카르타[1]
- 1217–1221년 – 제5차 십자군 전쟁[1]
- 1228–1229년 – 제6차 십자군 전쟁[1]
- 1248–1254년 – 제7차 십자군 전쟁[1]
- 1270년 – 제8차 십자군
- 1271–1272년 – 제9차 십자군
3. 정치와 사건
780년 이후로 게르만 민족대이동이 점차 잦아들면서[29] 정착을 시작한 이들은 중세 성기에 정치, 사회적으로 조직화를 확립했다.[30]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의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유럽의 과학, 철학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는 중세 대학이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 등이 그 예이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노르웨이계 기독교 왕국을 발전시키는 한편 프랑스 노르망디나 영국제도에 정착했고, 마자르족은 10세기경 확장을 중단하고 헝가리 왕국을 세우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헝가리 왕국은 중부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지역 강호로 입지를 다졌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알프스산맥 북부의 세력이 없는 땅에 많은 부족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라인강 기슭의 숲을 개간하고 경작하면서 이 부족들은 프랑크 제국으로 성장했고, 이는 가톨릭 교회와 함께 성장하였다. 엘베강까지 세력을 넓힌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10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중엽에 걸쳐 스칸디나비아 왕국은 바이킹의 침입이 끝나면서 통일되어 기독교화되었고, 유럽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크누트 2세는 잉글랜드와 노르웨이를 지배했다. 1227년 발데마르 2세가 패배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덴마크의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스웨덴이 발트해 북부와 핀란드 남부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하는 동안, 노르웨이는 그린란드에서 맨 섬에 이르는 대서양 지배 지역을 확장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융성은 1266년 퍼스 조약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
중세 성기까지 현재의 국경선은 아니었지만, 카롤링거 제국은 프랑스 왕국과 독일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독일은 통합과 정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깃발 아래 있었다. 프랑스 왕국은 12세기부터 14세기 전반에 걸쳐 예술과 문학의 발흥기였다. 발루아 왕가의 흥기와 함께 잉글랜드 왕국과의 백년 전쟁, 흑사병이 유행했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독일 왕국은 분할되었다. 콘라트 4세가 죽자, 대공위 시대가 시작되었다. 1257년 이후, 왕위는 리처드와 알폰소 10세 사이에서 다투어졌다. 루돌프 1세가 선출되어 공위 기간은 종료되었다.
13세기 독일 왕국의 토지 관리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농노는 토지에 대한 연공을 납부하도록 요구받았다. "재산" 개념은 고대 재산권 형식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재산권에 사법권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세 성기에 헝가리 왕국(1000년 건국)은 중앙 유럽과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성 이슈트반 1세는 부족 사회의 풍습을 일소하고, 국민에게 정착을 강요했으며, 기독교 신앙과 윤리관, 기독교적인 생활 방식을 도입하여 독일의 국가 시스템을 모델로 하는 중세 국가로서의 헝가리의 기초를 쌓았다.
미에슈코 1세는 960년경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로부터 폴란드 공작 칭호를 받아 피아스트 왕조를 창시했다. 볼레스와프 1세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여 강대한 국가가 되었다.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가 사망하자 후계자 다툼으로 폴란드는 분열되었고, 브와디스와프 1세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711년 이후 무어인에게 점령당했다. 11세기와 13세기에 북부의 기독교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부와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무슬림을 몰아냈다.
이탈리아에서는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이 동방의 해운 무역으로 번영하고 있었다. 특히 피사, 아말피, 제노바, 베네치아의 제해권에서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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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성기는 슬라브계 키예프 루스의 흥망성쇠와 History of Poland during the Piast dynasty|피아스트 왕조 폴란드사|폴란드의 출현영어가 있었던 시대이다. 13세기 몽골 침략은 동유럽의 많은 나라가 침략, 약탈, 점령, 속국이 되면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 전반부(1025년-1185년)에 동로마 제국은 도나우강 남쪽 발칸 반도를 지배했고, 콤네노스 왕조 황제 아래에서 번영과 도시화가 부활했지만, 1185년에 불가리아 반란이 성공하면서 지배는 막을 내렸다. 동서 교회는 11세기에 정식으로 분열되었고,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동로마 제국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라틴 제국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불가리아 황제칼로얀에게 패배하면서 단명했다.
10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시대는 중세 온난기라고 불리며 비교적 온난했다. 농경지 확대는 인구 증가를 촉진했고, 1315년에는 150만 명이 희생된 기근이 일어났지만, 유럽의 인구는 전체적으로 증가했다. 인구 증가로 새로운 도시 건설이 촉진되었고, 공업과 경제 활동도 활발해졌다. 식량 생산도 증진되었는데, 무거운 쟁기 사용, 소 대신 말 사용, 삼포제 도입과 같은 신기술 도입에 의한 부분이 크다.
기사 신분이 11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일반화되었고, 마상 창 시합이 고안된 것도 이 무렵이다. 12세기에 클뤼니 수도원 수도승들이 신학적으로 정당한 전쟁이라는 개념을 제창하고, 템플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 기사단 창설을 고취했다.
3. 1. 잉글랜드와 프랑스
노르만족은 1169년 아일랜드를 침공하여 곧 이 나라 대부분에 정착했지만, 그들의 거점은 남동부에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도 거의 같은 시기에 봉신국으로 복속되었지만, 스코틀랜드는 나중에 독립을 주장했고, 웨일스는 1282년 리웰린 압 그리피드가 사망할 때까지 대체로 독립적인 토착 군주들의 통치를 받았다.[6] 잉글랜드 재무부는 헨리 1세 치세인 12세기에 설립되었고, 최초의 잉글랜드 의회가 소집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영토를 국내에 많이 가지고 있어 고심하였는데, 필리프 2세 때 차차 이것을 탈환하였다.3. 1. 1. 노르만 왕조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거의 프랑스화(化)한 노르만인은 잉글랜드와 남이탈리아에 노르만 왕조를 세웠으며,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다른 데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통일 왕권이 탄생했다.[6] 윌리엄 1세는 1066년 죽은 에드워드의 모계(母系) 혈통이 있음을 근거로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 노르만 귀족을 이끌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를 격파하고 각지의 저항을 배제하여 잉글랜드를 통일했다. 그는 앵글로색슨계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노르만계 귀족에게 봉해줌으로써 거기에 새로운 봉건적 계층제를 만들어냈으며, 이로써 지배계급은 색슨 귀족으로부터 노르만 귀족으로 옮겨졌다. 노르만 국왕 중심의 봉건제도가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과의 문화교류가 성행되는 등 영국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또한 전국의 토지 대장 둠스데이 북을 1086년 완성하고 징세 제도를 정비했다. 그는 강력한 집권적 행정조직을 구축하여 교황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까지 무릅쓰면서 사교, 성직자를 그 통제 밑에 두었다. 그 뒤에 윌리엄 2세에 의해서 계승된 이러한 정책은 잉글랜드의 정치·사회·문화의 프랑스화를 결정적으로 방향짓게 되었다.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잉글랜드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귀족이 통치하는 왕국이 세워졌다. 1215년, 노르망디를 잃은 후,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법으로 서명하여 잉글랜드 군주의 권한을 제한했다.
3. 2. 신성 로마 제국
962년 오토 1세의 로마 대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의 세속적 제권(帝權)을 보편적인 그리스도교적 제권에까지 높여 정당화하려고 하였다.[29] 그러나 이 정책은 황제가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심화시켜, 이탈리아 간섭을 촉구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는 황제권과 교황권이라는 두 중심을 가진 중세 유럽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양측의 대립과 항쟁의 역사까지 전개되었다.1024년 콘라트 2세의 즉위로 시작되는 잘리에르 왕조에서 황제의 교회 정책은 현실정치적 정책 아래 퇴폐한 교회의 숙정(肅正)을 도모하려는 로마 교황과의 대립을 낳았다. 이는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 간의 성직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싸움은 카노사의 굴욕을 거쳐 황제가 교황을 살레르노에서 1085년 사망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내 상급 귀족의 반란에 패하여 하인리히 5세 시대에 보름스 협정으로 종결됐다.[29] 이 사건으로 오토 대제의 체제는 무너졌고, 카를 대제 이래의 동로마적 신정정치 이념은 부정되었다. 황제는 세속적 특권 수여의 권리에 의하여 봉건법적으로 국제(國制) 속에 편입되었다.
서임권 투쟁으로 동요한 제국의 재건을 시도한 것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였다.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 국내의 왕령을 황제의 가산제적(家産制的) 관료인 제국 미니스테리알레에 의해서 경영하고 황제권의 실질적 기반을 확립하려 했다. 이 정책은 국내 제후 세력과 대립했고, 특히 벨프가의 하인리히 사자공과 충돌하여 1180년 사자공은 성실 의무 위반으로 실각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제국 제후에 대하여 황제권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 국가 체제를 만들려고 했으나 좌절됐다. 그는 이탈리아 정책을 강화하고 혼인 정책으로 시칠리아 왕국을 획득했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거점으로 제국 형성을 시도한 하인리히 6세는 젊어서 사망하여 황제권 확립 기회가 사라지고, 제국 제후의 분립적(分立的) 지배 체제가 진행되었다.[29]
3. 3. 이베리아반도
후우마이야 왕조가 해체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타이파들에게 분열되었고,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독교 국가의 레콩키스타가 본격화되었다. 프랑크의 카를 대제가 설치한 피레네 남쪽 기슭의 스페인 변경백(Marca Hispanica)에서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나바라가 일어나고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레온이 일어났으며, 다시 레온에서 카스티야가 분립하고, 나바라에서는 아라곤이 떨어져 나왔다.[29] 이들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상호간에, 또한 이슬람과의 충돌 사이에 결혼이나 병합을 통해 서서히 여러 왕국이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는 징조를 보였다.현재 포르투갈의 북반부 지역은 1055년 이후 레온, 카스티야에게 점령되어 코임브라를 수도로 하는 백작령이 되었다. 프랑스 왕족 부르고뉴가의 앙리가 카스티야를 응원하였으므로 알폰소 6세는 그의 딸을 주어 포르투갈 백작으로 세웠으나(1093) 앙리의 아들 아퐁소 엔리케(1112-1185)는 카스티야와 대립하였다. 포르투갈은 1143년 교황의 조정에 의하여 왕국으로서 독립하고 이슬람에 대해서도 자주 승리를 거두었으며, 남하하여 리스본을 점령하여(1147) 타구스강까지 국경을 넓힌데다 카스티야와도 치열한 전쟁을 계속, 더욱더 독립을 재확인시켰다(1179).[29]
이후 레콩키스타 세력들은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등의 마그레브 이슬람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서히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에서 몰아내었다.[29]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지정학적 발전은 1085년 톨레도의 기독교 정복이었다. 전쟁에 지배된 북부 기독교 왕국의 사회 구조와 관계는 만연한 군사적 갈등의 요구에 종속되었다.[7] 북부 기독교 왕국의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은 기사단과 보병에 대한 군사적 요구와 정착민의 촉진이 잠재적인 장원제 수입보다 우선시되는 국경 사회를 만들었다. 군사 기사단은 중앙 고원의 국경 지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중해성 기후 지역의 농업 모델은 일반적으로 2년 윤작을 기반으로 했다.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은 이 기간 동안 비교적 경직된 상태를 유지했다. 10세기와 13세기 사이에, 특권을 누리고 재산을 획득할 가능성으로 인해 노출된 지역으로의 남쪽 이주가 장려되었다. 반대로, 이슬람 통치 지역에서 만연한 집약 농업 모델은 영토 확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8] 이슬람 지역이 어느 정도의 인구 통계적, 재정적 우위를 누렸지만, 북아프리카의 알모라비드와 알모아드는 불안정한 국가 구조를 특징으로 했다. 톨레도를 점령하려는 (실패한) 시도를 제외하고, 그들은 팽창주의 정책을 수행한 것으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3. 4. 동유럽과 발칸반도

중세 성기는 슬라브계 국가인 키예프 루스가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쇠퇴한 시기이며, 쿠만족이 등장하기도 했다. 13세기에 몽골의 침략은 유럽 동부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침략, 약탈, 정복되거나 종속되었다.[29]
이 시기의 전반부(1025년~1185년경) 동안 비잔틴 제국이 동남유럽을 지배했고, 코므네노스 왕조 황제 치하에서 번영과 도시화가 부활했다. 그러나 1185년 블라흐-불가리아 반란이 성공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동남유럽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이후 이 지역은 그리스의 비잔틴 제국, 마케도니아 일부, 트라키아, 불가리아의 모에시아,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대부분, 그리고 북서쪽의 세르비아로 분할되었다.
11세기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공식적으로 분열되었고, 12세기 동안 간헐적인 협력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비잔틴 제국은 결국 14~15세기에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 의해 약화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 황제 칼로얀이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1205년)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후 라틴 제국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3. 5. 헝가리 왕국

중세 성기 시대에 헝가리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세 국가 중 하나였다. 기독교 헝가리 왕국은 1000년 성 이슈트반 1세 왕에 의해 건국되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아르파드 왕조가 통치했다. 성 라슬로 왕은 성 이슈트반 왕의 업적을 완성했다. 그는 헝가리 국가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전략적 리더십, 군사적 재능은 내부 권력 투쟁과 외세의 군사적 위협을 종식시켰다. 헝가리 왕국은 아드리아 해 해안까지 확장되었고 1102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와의 동군 연합을 맺으면서 다른 종속국을 세우며 동남 유럽과 카르파티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작은 제국이 되었다. 헝가리 왕실 아르파드 왕조는 한 가문에서 가장 많은 성인과 복자를 배출했다.[29][30]
3. 6.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게르만 민족대이동이 점차 잦아들면서, 폴란드 지역에도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29] 이들은 중세 성기에 정치, 사회적으로 조직화를 확립했다.[30]13세기 초, 리투아니아는 리투아니아 공국으로 등장했으며, 1251년부터 1263년까지 잠시 리투아니아 왕국이 되었다. 초대 기독교 왕 민다우가스가 암살된 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알려졌다. 리투아니아 십자군 동안 정복되지 않은 리투아니아는 정복을 통해 동쪽으로 빠르게 확장되어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4. 십자군 원정
엘베강까지 세력을 넓힌 프랑크 왕국은 가톨릭 교회와 함께 성장하며 정치적인 권력의 절정에 이르렀고,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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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타임라인은 십자군 원정 시기를 나타낸다.
4. 1. 십자군의 발단과 영향
십자군은 11세기 유럽이 종교적·정치적으로 발효(發酵) 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적인 세계 정복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십자군의 발단은 그레고리우스 7세부터로, 이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이를 포함하는 제국을 확립하며 정치적, 도덕적인 퇴폐로부터 그리스도교를 구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도의 의무이며, 가톨릭 교회의 이상이라고 생각하였다. 11세기에 이슬람 세계의 패권국이 된 셀주크 투르크는 소아시아에 진출하여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였다. 이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용병 모집을 로마 교황에게 의뢰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그리스 정교회를 지배하고 전 유럽에 군림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십자군이란 형식으로 이에 응하였다.[29]사람들이 종교적 정열을 품고 있음은 확실하였으며, 따라서 영주는 영토와 전리품을 노리고, 상인은 동지중해의 상권을 획득하려고, 농민은 영주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심산으로 십자군에 참여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주가 소비의 증대와 더불어 주위의 자유 농민을 농노화하고 다시 다른 영주의 영지를 빼앗아 농노에 대한 착취를 강화했기 때문에 영주 사이의 전쟁, 농민의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봉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대립을 밖으로 빗나가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덟 번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1차 십자군을 제외하면 성과는 미미했으며, 십자군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당시 유럽이 ‘지리상의 발견’ 이후와 달라서 계속적이고 조직적인 식민을 할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며, 1차 십자군의 일시적 성공은 이슬람측의 분열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었으므로 이슬람이 통일된다면 십자군 국가의 명맥이 끊어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자군은 교황권의 성쇠, 국왕권의 강화, 상업의 발달 등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30]

가톨릭 십자군은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일어났다. 이들은 교황의 권위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처음에는 무슬림 파티마 칼리파조로부터 지역을 빼앗아 ''성지''에 기독교 통치를 재건하려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파티마는 970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했고, 1073년에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빼앗겼다가 1098년에 다시 되찾았지만,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결과로 다시 잃게 되었다.[23][24]
십자군은 원래 무슬림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성지를 되찾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이 작전은 아나톨리아 반도로의 무슬림 셀주크 투르크의 확장에 대한 도움을 정교회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요청받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경제적·정치적 이유의 혼합으로 이교도와 이단, 파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레반트 바깥의 지역에서 16세기에 걸쳐 행해진 동시대의 작전과 이어진 작전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양측의 적대 관계는 제5차 십자군의 룸 셀주크 술탄국과의 기독교도 동맹 관계처럼 적에 대한 종파 간의 동맹 관계로도 이어졌다.
십자군은 광범위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영향을 미쳤으며, 이 중에는 현대까지 이어지는 것도 있다. 기독교 왕국과 정치 권력의 내분으로 인해, 십자군 원정대는 제4차 십자군처럼 기독교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과 베네치아 공화국과 십자군 사이의 동로마 제국 분할로 이어지는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례가 있다. 제6차 십자군은 교황의 공식적인 호소 없이 시작된 최초의 십자군이었다.[25] 제7차 십자군, 제8차 십자군, 제9차 십자군은 제9차 십자군이 중동에서 십자군의 종말을 맞이하고 맘루크와 하프스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26]
4. 2. 주요 십자군
십자군은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 교황의 권위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처음에는 무슬림 파티마 칼리파조로부터 성지에 기독교 통치를 재건하려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파티마는 970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했고, 1073년에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빼앗겼다가 1098년에 다시 되찾았지만,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결과로 다시 잃게 되었다.
십자군 | 기간 |
---|---|
제1차 십자군 | 1095년 - 1099년 |
제2차 십자군 | 1147년 - 1149년 |
제3차 십자군 | 1187년 - 1192년 |
제4차 십자군 | 1202년 - 1204년 |
제5차 십자군 | 1217년 - 1221년 |
제6차 십자군 | 1228년 - 1229년 |
제7차 십자군 | 1248년 - 1254년 |
제8차 십자군 | 1270년 |
제9차 십자군 | 1271년 - 1272년 |
십자군은 원래 무슬림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성지를 되찾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의 확장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다. 십자군은 레반트[23] 바깥 지역에서 16세기에 걸쳐 이교도, 이단, 파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행해졌다.[24] 기독교도와 무슬림은 때로는 종파 간 동맹을 맺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제5차 십자군에서는 기독교도와 룸 셀주크 술탄국이 동맹을 맺었다.
십자군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 국가들 간의 내분으로 인해,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동로마 제국을 분할하는 등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제6차 십자군은 교황의 공식적인 호소 없이 시작된 최초의 십자군이었다.[25] 제7차 십자군, 제8차 십자군, 제9차 십자군은 맘루크와 하프스 왕조의 승리로 끝났으며, 제9차 십자군은 중동에서 십자군의 종말을 알렸다.[26]
4. 3. 군사 수도회
십자군 시대에, 기사단의 모형이 될 군사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다.성전 기사단은 제1차 십자군 이후 적대적인 현지인과 강도들로부터 기독교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기독교 군사 단체였다.[1] 이 단체는 은행업에 깊이 관여했고, 1307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서 이 단체 전체를 이단 혐의로 체포하고 해체했다.[1]
구호 기사단은 원래 예루살렘에서 1080년에 창설된 기독교 단체로, 성지로 순례하는 가난하고, 병들거나 부상당한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되었다.[1] 예루살렘이 제1차 십자군에서 점령된 후, 종교 단체이자 군사 단체가 되어 십자군 국가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1] 성지가 이슬람 세력에게 결국 점령된 후, 그들은 활동 거점을 로도스 섬으로 옮겼고, 이후에는 몰타로 옮겼다.[1]
튜튼 기사단은 1190년 아크레에서 형성된 독일 종교 단체로, 성지로 가는 기독교 순례자를 돕고 해외 영토에서 병들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 설립되었다.[1] 이슬람 세력이 성지를 점령한 후, 이 단체는 1211년 트란실바니아로 옮겨졌고, 이후 축출된 후 이교도 프로이센을 침략하여 발트 지역을 기독교화하려 했다.[1]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이교도 주요 적대 세력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되기 전과 후에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폴란드 왕국 (1025-1385)과 같은 다른 기독교 국가들을 공격했다.[1]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튜튼 기사단의 힘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참패하면서 무너졌다.[1] 그룬발트 전투 이후 이 단체는 1809년 공식적으로 해산될 때까지 세력이 쇠퇴했다.[1]
5. 사회와 경제
780년 이후 게르만족의 민족 대이동이 잦아들면서 중세 성기에 정치, 사회적 조직화가 확립되었다.[29][30]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의 과학과 철학 부흥을 이끌었다.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 등을 시작으로 중세 대학 설립이 시작되었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노르웨이계 기독교 왕국을 발전시켰고, 마자르족은 헝가리 왕국을 세우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중부 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알프스산맥 북부 지역에 많은 부족들이 정착했다. 이들은 라인강 기슭의 숲을 개간하여 프랑크 제국으로 성장했고, 가톨릭 교회와 함께 성장하며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중기에 기독교 수도원 생활이 황금기를 맞이했다. 베네딕토회는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랐고, 시토회는 수작업과 자급자족을 중시했다. 13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 카르멜회, 도미니코회,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등의 탁발 수도회가 흥륭했다.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재발견한 안셀무스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기독교식 학습 방식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보나벤투라, 피에르 아벨라르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경험론을 바탕으로 세속 연구, 이성, 논리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 교리를 지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주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이행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마음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로스켈리누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등도 유명한 스콜라 학자였다. 이 시대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보편 논쟁이었다. 요하네스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 등은 스콜라 철학에 반대했다.
12세기 북유럽에서는 뤼베크를 중심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들이 가입한 자유 도시 연합 한자 동맹이 결성되어 해상 무역을 추진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브뤼헤, 그단스크 등도 한자 동맹에 참여했다.
13세기 후반, 베네치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여행하고 '''동방견문록'''을 저술하여 서양에 극동을 알렸다. 이후 윌리엄 루브룩 등 많은 기독교 사절과 여행자들이 동방을 방문했다.
5. 1. 장원제의 동요
11세기, 12세기 바퀴 쟁기 사용, 농경 용구 개량 등 농업 기술이 발전하였다. 삼포식 농업 보급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촌락의 공동체적 규제를 강화했다. 이는 농민을 장원 영주의 지배에서 분립시키고, 영역적(領域的) 봉건 영주 지배 아래 편입시켰다. 한편 농업 생산력 향상은 장원 내 잉여 생산물을 가져와 상인·수공업자 발생을 촉구하여 교환, 화폐경제를 부활시켰다. 도시 발달과 함께 영주와 농민은 더욱 화폐경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영주는 부역의 금납화(金納化)를 꾀하거나, 직영지(直營地)를 농민에게 분할, 대여하여 농민으로부터 현물 또는 화폐 지대(地代)를 징수하였다. 즉 ‘고전 장원’이 붕괴하였으며, 영주는 농민이 납부하는 현물, 화폐 지대에 기생하는 ‘순수 장원' 또는 ‘지대 장원’의 영주가 되었다. 이것은 농민의 영주에 대한 인격적 예속 관계를 약화시키고, 농민을 ‘농노’ 신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된다. 또한 인구 증가는 개간과 식민(植民)을 왕성하게 했다. 개간지에서 농민은 영주로부터 인격적 자유가 인정되었고, 화폐 또는 현물로서의 공납(貢納) 이외에는 의무를 지지 않았다.[1]5. 2. 상업과 무역의 발달
12세기 북유럽에서는 자유 도시들의 연합인 한자 동맹이 결성되어 해상 무역을 증진시켰다. 1158년에서 1159년 사이에 뤼베크가 설립되었고, 이 도시는 이후 한자 동맹을 주도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암스테르담, 쾰른, 브레멘, 하노버, 베를린 등 많은 북부 도시들이 한자 동맹에 가입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외의 도시로는 브뤼헤, 폴란드의 그단스크(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등이 있었다. 노르웨이의 베르겐과 러시아의 벨리키 노브고로드에는 한자 동맹의 공장과 중개인이 있었다. 이 시기에 독일인들은 제국 너머 프로이센과 실레지아로 동유럽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13세기 말, 베네치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여행한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동방견문록에 자신의 여행을 기록하면서 서양인들은 극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는 윌리엄 루브루크,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 앙드레 드 롱주모, 포르데노네의 오도리코, 조반니 데 마리뇰리, 조반니 디 몬테 코르비노, 니콜로 데 콘티와 같은 다른 여행자들을 포함하여 동방으로 가는 수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뒤를 따랐다.
5. 3. 기후와 농업
중세 온난기는 10세기부터 거의 14세기에 걸쳐 나타난 비교적 온난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스칸디나비아 북부에서도 밀을 재배할 수 있었고, 북잉글랜드에서도 포도주용 포도가 재배되었다.[22] 농경지가 확대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유럽 전체 인구도 늘어났다. 비록 1315년에는 150만 명이 희생된 기근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인구 증가는 새로운 도시 건설을 촉진했고, 공업과 경제 활동도 활발하게 만들었다.이 시기에는 식량 생산도 늘어났는데, 이는 종래의 것보다 무거운 쟁기 사용, 소 대신 말 사용, 이전의 이포제보다 다양한 작물 재배에 적합한 삼포제 도입 등 신기술 덕분이었다. 특히 삼포식 농법에서는 콩류 재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콩류는 토양에서 중요한 영양분인 질소 고갈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5. 4. 기사도의 융성
11세기에는 중장 기병대인 기사 계급이 유럽 전역에 일반화되었고, 마상 창 시합도 이 시기에 고안되었다. 말과 갑옷 등 중장비를 갖추는 초기 투자는 쉽지 않았지만, 농노 계층에게 기사가 되는 것은 자유민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12세기가 되자,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신학적으로 정당한 전쟁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템플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 기사단의 창설을 이끌었다. 귀족 계급의 신분 세습이 이때 시작되었으며, 13세기 독일에서는 기사 신분도 세습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다른 국가로도 확산되었다.6. 문화와 사상
중세 성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이 등장했으며, 자문화중심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유 민족주의의 밑바탕이 된다. 이 시기 이탈리아반도의 도시국가는 상업을 발달시켰고, 스페인 알 안달루스는 이슬람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속하며 문화를 꽃피웠다. 철학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을 재발견하여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 건축에서는 고딕 양식이 완성되었다.
12세기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지적 부흥은 중세 대학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스페인 및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계와 접촉하고, 십자군으로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레반트와 접촉하면서 유럽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븐 알 하이삼, 이븐 루시드의 저작 등 아랍어 및 그리스어 과학 문헌을 접할 수 있었다. 유럽의 대학은 이러한 서적의 번역과 보급을 지원하며 과학적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기초를 시작했다.
로마네스크 건축과 구분되는 고딕 양식은 1000년부터 13세기까지 서유럽에서 발전했으며, 그 이후는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19세기 미술사가, 특히 로마네스크 건축 전문가들은 로마 건축 양식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매우 다른 특징을 발전시킨 이 양식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명명했다.
안정된 서유럽 사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그림과 조각에 재원을 사용하여 기독교 미술을 이끌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미술이 발전하면서, 추상 미학이 헬레니즘 예술의 자연주의를 대체했다. 비잔틴 미술은 사람이나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 종교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도 위엄을 갖추었다.
중세 성기의 문학은 다양한 문화, 특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는 라틴 문학에서 중요했으며, 로마 문학의 문학군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른 이야기군으로는 프랑스 문학(샤를마뉴와 궁정 이야기), 동로마 제국 국경 수비병의 기사도를 다룬 아크리틱 송|아크리틱 송영어, 브리튼 문학(아서 왕과 궁정, 브르타뉴, 콘월, 웨일스 이야기) 등이 있다.
남프랑스에서는 궁정적 연애를 노래한 트로바두르로 유명한 오크어 문학|오크어 문학영어이 탄생했다. 여기에는 라틴 문학과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요소가 포함되었다. 이후 그 영향은 서유럽의 여러 문화, 포르투갈, 독일의 미네징어, 시칠리아, 북이탈리아로 퍼져나갔다. 이탈리아에서는 페트라르카와 단테의 청신체가 생겨났으며, 단테는 『신곡』을 썼다.
중세 성기 음악은 악보가 종교 시설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주로 종교적이었고, 세속 음악 악보는 후대에 적용되었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교회 음악의 지배적인 형식이었으며, 오르가눔, 클라우술라, 콩두쿠투스, 모테트 등의 형식은 성가를 사용하여 발전했다. 귀도 다레초는 악보를 발전시켜 성가 가수가 그레고리오 성가를 쉽게 기억하도록 했다.
12세기와 13세기 유럽에서는 새로운 발명, 생산 방식의 혁신, 경제 성장이 급격히 변화했다. 풍차, 수차, 인쇄술(활자는 사용되지 않음), 화약, 천체 관측기, 안경, 가위, 시계, 선박 등 주요 기술 발전이 있었다.
발명품 | 내용 |
---|---|
풍차 | 1185년 영국 요크셔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 발견 |
종이 제조 | 1270년경 이탈리아에서 시작 |
물레 | 13세기에 유럽으로 유입 (아마도 인도에서) |
자침 | 12세기 후반 유럽에 처음 등장, 항해에 도움 |
안경 | 12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발명 |
천체 관측기 | 이슬람 스페인을 거쳐 유럽으로 돌아옴 |
인도-아라비아 숫자 | 피보나치가 1202년 산반서를 통해 유럽에 소개 |
선미 부착 키 | 1180년경 교회 조각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발견 |
6. 1. 기독교와 교회
1054년 동서 교회 분열은 기독교 교회를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의 동방 정교회로 공식적으로 분리시켰다. 이는 교황 레오 9세와 총대주교 미카엘 1세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발생했는데, 주된 원인은 필리오케 문제, 교황의 권위, 전례에서 무교병 사용 여부 등이었다.분열 이후 기독교는 서방의 가톨릭 교회와 동방의 정교회로 나뉘어, 교리, 신학, 언어, 정치, 지리적인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1095년에 시작된 십자군 파견, 1182년 동로마 제국에서 라틴계 주민 학살,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과 약탈 등은 양측의 화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중반은 기독교 수도원주의의 황금기(8세기-12세기)의 절정이었다. 이 시기에는 베네딕토회(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와 시토회(흰 옷을 입은 수도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대표적)가 발전했다.
13세기에는 탁발 수도회가 등장했는데, 주요 교단으로는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 흔히 회색 형제회, 1209년 설립), 카르멜회(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은수자, 흔히 백색 형제회, 1206–1214년 설립), 도미니코회(설교자 수도회, 흔히 검은 형제회, 1215년 설립), 어거스틴회(성 어거스틴의 은수자, 흔히 오스틴 형제회, 1256년 설립) 등이 있다.
6. 1. 1. 카타리파와 왈도파
카타리파는 10세기 중반 경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영지주의적 운동이다.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 존재했지만,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와 주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Cathar'(카타르)는 그리스어 'katharos'(순수한)에서 유래했다. 1181년 쾰른의 이단자들에 대해 글을 쓴 에크베르트 폰 쇤아우는 "Hos nostra Germania catharos appellat."(우리 독일에서는 이들을 "카타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했다.
카타르파는 '''알비조아파'''라고도 불린다. 1181년 비제오스의 연대기 작가 제프루아 뒤 브뢰이가 사용한 이 명칭은 남부 도시 알비 (고대 알비가)에서 유래했지만, 중심지는 툴루즈와 그 인근 지역이었기에 정확하지 않다.
알비조아파는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북부, 신성 로마 제국 남서부에서 강세를 보였다. 보고밀파는 동남유럽에서 강세를 보였으며, 보스니아 왕들에 의해 지원받는 공식 종교였다. 이원론자들은 역사적 사건이 선(영적) 세력과 악(물질적) 세력 간의 투쟁의 결과이며, 세상은 악의 세력에 속하지만, 금욕주의와 선행을 통해 제어하거나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알비 십자군, 레스터 백작 시몬 드 몽포르, 몽세귀르, 케리뷔 성 등이 카타리파와 관련된 주요 사건 및 인물이다.
리옹의 피터 발도는 1175년경 종교적 경험 후 재산을 포기하고 설교자가 된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는 모든 종교적 관습이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종파인 왈도파를 창시했다. 발도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설교 권한을 거부당했지만, 1184년 파문될 때까지 자유롭게 발언했다. 그는 기독교 성직자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며, 면죄부 판매(시모니)와 성인 숭배 관행을 거부한다고 비판했다.[1]
왈도파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종교 개혁 발발 후 개신교로 융합되었다. 제네바의 존 칼빈과 그의 신학적 후계자들의 견해가 왈도파의 신학과 유사하여 더 광범위한 개혁주의의 일부가 되었다. 왈도파 교회는 여러 대륙에 여전히 존재한다.[1]
6. 2. 스콜라 철학

새로운 기독교 학습 방식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세 유대교 및 이슬람 철학(마이모니데스, 아비센나, 아베로에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비잔틴 및 이슬람 도서관에서 가져온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보나벤투라, 피에르 아벨라르등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경험론을 믿었고, 세속적인 연구, 이성, 논리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리를 지지했다. 그들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음이 비물질적 실체라는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적 믿음에 반대했다.
가장 유명한 스콜라 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였는데 (나중에 "교회의 박사"로 선언됨) 그는 플라톤주의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아퀴나스는 마음의 철학을 발전시켜, 마음은 출생 시 타불라 라사("백지")였으며, 신성한 불꽃을 통해 생각하고 형태나 아이디어를 인식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썼다.
다른 주목할 만한 스콜라 철학자로는 무하마드 아베로에스, 로셀린, 아벨라르, 피터 롬바르드,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주요 질문 중 하나는 보편 문제였다. 스콜라 철학 주류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주요 반대자로는 던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 피터 다미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및 빅토르 수도회 등이 있었다.[27]
6. 3. 건축


중세 성기의 건축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에서 고딕 건축 양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어둡고 육중한 형태가 특징이었지만, 고딕 건축은 플라잉 버트레스, 뾰족한 아치, 리브 볼트를 결합하여 가볍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빛을 신의 표현으로 여겼던 당시의 종교적 사상과 관련이 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빛을 신의 표현이라고 보았고, 이러한 가르침을 반영하여 건축 기술이 발전했다.[1] 다채로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큰 창문들은 풍부한 빛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에는 색채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물은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1] 높이 솟은 복잡한 리브 볼트와 팬 볼트는 하늘을 향한 움직임을 보여주며, 건물의 거대한 크기는 신에 대한 경배를 표현했다.[1]
고딕 대성당의 평면도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고딕 건축과 스콜라 철학''에서 언급된 것처럼, 스콜라 철학의 규칙에 따라 구획과 부구획으로 나뉘었다.[1]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노트르담 대성당이다.[1]
6. 4. 문학
다양한 문화가 중세 성기의 문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기독교였다. 기독교와의 연관성은 라틴 문학에서 가장 컸으며, 이는 로마의 소재의 문학 사이클에서 토착어에 영향을 미쳤다. 다른 문학 사이클에는 프랑스의 소재 (샤를마뉴와 그의 궁정에 관한 이야기), 비잔틴 제국의 국경 지대 기사도에 관한 아크리틱 송|아크리틱 송영어, 영국의 소재 (아서 왕, 그의 궁정, 브르타뉴, 콘월, 웨일스, 아일랜드 관련 이야기)가 있다. 익명의 독일 시인은 게르만 신화를 프랑스와 영국의 서사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시도하여 니벨룽겐의 노래를 만들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제프리 오브 몬머스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와 같은 다수의 시와 역사적 저술이 쓰여졌다.남부 프랑스에서는 오크어 문학이 탄생했으며, 이는 궁정 사랑을 노래한 트루바두르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라틴 문학과 아랍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요소가 포함되었다. 나중에 그 영향은 서유럽의 여러 문화, 특히 포르투갈과 독일의 민네징어를 통해 확산되었다. 프로방스 문학은 시칠리아와 북부 이탈리아에도 도달하여 단테 알리기에리와 페트라르카의 돌체 스틸 누오보 ("달콤한 새로운 스타일")의 토대를 마련했다. 중세 후기의 가장 중요한 시인 우화적인 ''신곡''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과 세속적인 오크어 문학의 산물이다.
6. 5. 음악


고중세 시대의 현존하는 음악은 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는 악보가 종교 기관에서 발전했으며, 세속 음악에 악보를 적용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초기에 그레고리오 성가는 교회의 주요 음악 형태였으며, 오르가눔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클라우줄라, 콩덕투스, 모테트를 포함한 다른 형태들이 성가를 소스 자료로 사용하여 발전했다.
11세기 동안 아레초의 귀도는 음악 표기법을 개발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이는 성가대원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했다.
12세기와 13세기에는 그레고리오 평성가가 다성 음악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프랑스 노트르담 악파 (레오냉, 페로탱)의 작품에서 나타났다. 이후 이는 ''아르스 노바'' (필리프 드 비트리, 기욤 드 마쇼)와 중세 후기의 음악 장르로 진화했다. 12세기의 중요한 작곡가로는 수녀 빙겐의 힐데가르트가 있었다.
11세기 후반 옥시타니(남부 프랑스)에서 일어난 트루바두르 운동은 가장 중요한 세속 운동이었다. 트루바두르는 종종 유랑 연예인이었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나왔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노래를 썼지만, 특히 궁정 사랑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의 스타일은 북부 프랑스의 트루베르, 독일의 민네징어,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의 세속 음악 작곡가인 트레첸토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2]
6. 6. 연극
중세 성기의 경제적, 정치적 변화는 길드의 형성과 도시의 성장을 가져왔고, 이는 이 시기부터 시작되어 후기 중세 시대까지 이어지는 연극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무역 길드는 대개 종교적인 내용의 연극을 공연하기 시작했으며, 종종 자신들의 직업과 관련된 성경 이야기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제빵사 길드는 최후의 만찬을 재현했다.[13] 영국 제도에서는 중세 시대에 약 127개의 다른 도시에서 연극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자국어 미스터리 연극은 많은 수의 연극을 순환하는 방식으로 쓰여졌는데, 요크 (48편), 체스터 (24편), 웨이크필드 (32편), 미상 (42편)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더 많은 수의 연극이 남아 있으며, 후기 중세 시대에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어떤 종류의 종교극이 공연되었다. 이러한 연극 중 많은 작품에는 코미디, 악마, 악당, 광대가 등장했다.[14]중세 시대에는 많은 수의 세속적 공연도 무대에 올려졌는데, 그 중 가장 초기의 예는 1276년 아담 드 라 알이 쓴 ''녹색 숲의 연극''(The Play of the Greenwood)이다. 이 작품에는 풍자적인 장면과 민속 자료, 예를 들어 요정과 기타 초자연적인 현상이 포함되어 있다. 풍자극 역시 13세기 이후 급격히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연극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래했으며, 성과 신체 배설물을 강조하는 등 어조와 형태가 비슷했다.[15]
6. 7. 과학과 기술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 서유럽에 남은 고대 그리스 텍스트의 몇 안 되는 사본과 주석을 바탕으로 초기 중세 시대의 철학적 및 과학적 가르침이 이루어졌다. 그리스어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대부분 라틴어로만 연구되었다.12세기 르네상스 동안 이 시나리오는 바뀌었다. 중세 대학교의 탄생과 함께 유럽의 지적 부흥이 시작되었다. 레콩키스타 기간 동안 스페인과 시칠리아에서 이슬람 세계와 접촉하고, 십자군 기간 동안 비잔틴 세계 및 무슬림 레반트와 접촉하면서 유럽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알하젠, 아베로에스의 저작물을 포함한 과학적 아랍어 및 그리스어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었다.[12] 유럽 대학은 이러한 텍스트의 번역 및 보급에 실질적으로 기여했으며 과학 공동체에 필요한 새로운 기반 시설을 시작했다.
13세기 초에는 거의 모든 지적으로 중요한 고대 저자들의 주요 저작물을 비교적 정확하게 라틴어로 번역했으며,[12] 이를 통해 대학과 수도원을 통해 과학적 아이디어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이러한 텍스트에 포함된 자연 과학은 로버트 그로세테스트, 로저 베이컨,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던스 스코투스와 같은 주목할 만한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확장되기 시작했다. 현대 과학적 방법의 전조는 그로세테스트가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수학을 강조한 점과 베이컨이 특히 그의 ''오푸스 마이우스''에서 칭찬한 경험적 접근 방식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와 13세기 유럽에서는 새로운 발명의 속도, 전통적인 생산 방식의 관리 혁신, 경제 성장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불과 한 세기 만에 지구 전체에서 인류 역사상 이전 천 년 동안보다 더 많은 발명이 개발되고 유용하게 적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풍차, 수차, 인쇄술(아직 활자는 사용되지 않음), 화약, 천체 관측기, 안경, 현대적 형태의 가위, 더 나은 시계, 대폭 개선된 선박의 채택 또는 발명을 포함한 주요 기술 발전이 있었다. 후자의 두 가지 발전은 대항해 시대의 새벽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발명은 외국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받았다.
앨프리드 W. 크로스비는 그의 저서 ''현실의 측정: 서유럽의 정량화, 1250-1600''에서 이러한 기술 혁명의 일부를 묘사했으며, 다른 주요 기술 역사가들도 이를 언급했다.
발명품 | 내용 |
---|---|
풍차 | 1185년 영국 요크셔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 발견 |
종이 제조 | 1270년경 이탈리아에서 시작 |
물레 | 13세기에 유럽으로 유입 (아마도 인도에서) |
자침 | 12세기 후반에 유럽에 처음 등장, 항해에 도움 |
안경 | 12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발명 |
천체 관측기 | 이슬람 스페인을 거쳐 유럽으로 돌아옴 |
인도-아라비아 숫자 | 피보나치가 1202년 저서 산반서를 통해 유럽에 소개 |
선미 부착 키 | 1180년경 교회 조각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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